"결혼도 꼭 하고, 이왕 결혼을 한 김에 아이는 꼭 낳아 길러봐야 한다."
어르신들이나 인생 선배들이 입버릇처럼 하던 이 말, 예전의 저는 도무지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그 말이 너무 싫었습니다. 특히, 육아에 대해서는 끝없는 희생과 인내만 강요하는 것 같아 거부감부터 들었거든요.
'나만 당할 수 없다 이건가? 다 같이 불구덩이로 들어가자는 소리 아니야?' 그들의 조언이 무책임해 보이기도 하고, 꼰대들의 듣기 싫은 잔소리라고만 생각했죠. 그런데 참 웃기죠? 그랬던 제가, 이제 막 첫째 하나로도 힘들다는 후배에게
"야, 둘째 꼭 낳아. 진짜 예뻐."라고 권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거창하지 않아도 아이들만이 줄 수 있는 그 뭉클뭉클한 행복을 늘 가까이서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악일 뻔했던 순간을 행복한 추억으로 만들어준, 멜버른의 빗속 이야기처럼요.
여름의 시드니, 가을의 멜버른... 그리고 방심
9박 10일의 호주 여행 중 6일 차 되던 날, 우리는 시드니를 떠나 멜버른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두 도시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시드니는 반소매를 입고 다닐 만큼 따뜻한 여름 날씨였는데,
멜버른은 늦가을처럼 공기부터가 차가웠거든요.
멜버른의 일교차가 크다는 것쯤은 미리 알고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소나기'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호텔을 나서기 전, '설마 비가 오겠어?' 하고 넘겨짚었던 그 '한 순간의 방심'이 화근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우리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저녁을 먹으러 나갔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멜버른의 변덕스러운 날씨가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슈퍼마켓으로 급히 피신했지만 20분이 지나도 비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추위'였습니다. 늦가을 같은 멜버른의 밤공기에 찬 비까지 더해지니, 얇은 옷만 입은 우리 가족은 오들오들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기에 6일간 쌓인 피로까지 겹쳐, 부모님도 아이들도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결국 저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일단 뛰어서 트램을 타자!" 하지만 급하게 탄 트램은 세 정거장 만에 호텔과 정반대 방향으로 틀어졌고, 우리는 비 내리는 낯선 거리 한복판에 다시 내려야만 했습니다. 호텔까지 도보 13분. 우산도 없이, 그 차가운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걸어야 했습니다.
예고된 불호령, "아버지의 눈치"
사실 저는 쏟아지는 비보다, 추위보다 더 무서운 게 있었습니다. 바로 제 등 뒤에 계신 '아버지'였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평소 모든 상황을 예측하고 철저하게 준비할 것을 요청하시는 분이 십니다.
( 정작 본인께서는 그렇게 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예상 밖의 변수나 실수를 용납하지 않으시고,
그런 상황이 오면 정말 매정하다 싶을 정도로 차갑게 말씀하시는 성격이시죠.
"날씨 하나 제대로 확인 안 했니?" "호텔 방에 우산을 미리 챙겼어야지. 이게 뭐냐 애들 감기 걸리게."
안 그래도 추위에 떨고 계신 아버지의 표정은 이미 굳어 있었습니다.
제 속은 후회와 공포심으로 새카맣게 타들어 갔습니다. '아, 이번 여행도 쉽게 흘러가지 않는구나.'
살얼음판을 깬 아이들의 "까르르"
차가운 빗줄기 속에 무거운 정적만 흐르던 그때, 갑자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으아! 차가워! 엄마, 너무 재밌어!" "할아버지! 나 물에 빠진 생쥐 됐어! 크하하!"
어른들에게는 뼈 시리게 춥고 짜증 나는 '재난 같은 상황'이었지만, 아이들에게는 그저 신나는 놀이였습니다.
아이들은 비에 젖은 머리를 털고 웅덩이를 밟으며 멜버른의 밤거리를 신나게 뛰어다녔습니다.
그 천진난만한 웃음소리가 얼음장 같던 분위기를 순식간에 녹여버렸습니다.
방금까지 매서운 눈으로 저를 질책하려던 아버지의 얼굴이, 아이들을 보며 서서히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허허... 녀석들, 그렇게 좋으냐?"
아버지의 입에서 호통 대신, 너털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래, 살다 보니 멜버른에서 비도 다 맞아보고... 어서어서 가자!"
평소라면 상상도 못 할 반응이었습니다. 그 철두철미를 추구하신 아버지가, 준비 부족으로 비에 쫄딱 젖어 떨고 있는 이 엉망인 상황에서 소리 내어 웃고 계시다니요.
그 순간 저는 깨달았습니다. 차가운 멜버른의 비를 뚫고 아버지를 웃게 만든 건, 완벽한 여행 계획표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즐거움을 찾아내는 아이들의 순수함'이었다는 것을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우리는 호텔로 돌아가는 10분 내내 다 같이 빗속을 뛰어다니며 웃었습니다. 춥고 축축했지만, 마음만은 호주 여행 중 가장 따뜻했던 밤이었습니다. 우리는 호텔 로비에 도착해 비에 홀딱 젖은 서로를 쳐다보면 또 한 번 크게 웃었습니다.
흔히 부모가 아이를 키운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날 밤 저는 깨달았습니다. 때로는 아이들이 어른들의 스승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요.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옹졸한 어른들의 마음을 아이들은 웃음 하나로 가르쳐줍니다.
"괜찮아, 비 좀 맞으면 어때?"라고 말이죠.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이 시간은 어쩌면 제가 비로소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 덕분에 잊고 있었던 비 맞는 재미도 다시 느껴보고,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그릇을 넓히며 우리는 그렇게 함께 자라고 있습니다.
육아, 분명 힘듭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세상 어떤 보석보다 빛나는 기쁨이 숨어있기에, 저는 오늘도 슬그머니 후배에게 말을 건넵니다.
"그래도 낳아봐. 너도 곧 알게 될 거야."